2017년 2월 24일(금) 71번째 서울대 학위수여식이 열린다. 70회가 넘는 동안 서울대 학위수여식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을까?
학위수여식을 운동장에서?
서울대 학위수여식이 지금처럼 체육관에서 열린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7년부터였다. 관악으로 이전한 이후 20년간 입학식/졸업식은 모두 대운동장에서 열리는 행사였다. 바깥 날씨를 그대로 안고 가야 하는 것이 운동장인지라, 1975년 3월 관악에서 처음 열린 입학식에서는 참석자가 모두 우산을 쓴 채로 입학하기도 했다.
관악 이전 이전에는 동숭동 캠퍼스의 문리대 운동장에서 학위수여식(당시는 ‘졸업식’)이 열렸다. 8개 캠퍼스에 9개 대학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당시에는 서울대가 종합대학임을 실감하는 날이 문리대 운동장에 모여 입학식, 졸업식, 개교기념식을 열 때 뿐이었다고도 전한다.
6.25 전쟁 중에는 부산 임시 캠퍼스 근처의 초중등학교 강당을 빌어 조촐한 졸업식을 열기도 했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초라한 공간에서도 나름대로 품위를 갖추어 엄격하게 행사를 치르려 했던 당시 의지를 엿볼 수 잇다.
1951.9.29.
부산 임시캠퍼스 인근 남산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입학식에서 제5대 최규남 총장이 학생 대표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다. 초라한 중학교 강당에서도 격식을 갖추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보인다.
1973. 2. 26
문리대 운동장에서 열린 제27회 학위수여식
1982.2.26.
관악캠퍼스 대운동장에서 열린 학위수여식. 멀리 교문이 선명하게 보인다.
2016.8.29.
제70회 후기 학위수여식
졸업식? 학위수여식?
흔히들 ‘대학 졸업식’이라고 하지만 사실 서울대 졸업 행사의 공식 명칭은 ‘학위수여식’이다. ‘졸업식’이라는 익숙한 말 대신 ‘학위수여식’을 사용하게 된 것은 1989년 제43회 때부터였다.
1988년 ‘졸업식’이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로 파행에 이르자 당시 본부는 ‘졸업식행사개선위원회’를 만들고 행사 전반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당시 결정된 사항으로는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 외부 인사들의 상을 모두 ‘총장상’으로 바꾸어 서울대 졸업식을 외부 권위를 배제한 내부인의 행사로 만든다는 것, 공식 명칭을 ‘학위수여식’으로 바로 잡는다는 것 등이었다. 당시까지 학부 졸업을 더 중시하여 학부생들이 제일 먼저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 수여시 박사-석사-학사 순으로 수여하게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988.2.26.
제42회 ‘졸업식’장에서 고 박종철의 명예졸업장 수여를 요구하며 기습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1990.2.26.
공식 명칭이 ‘학위 수여식’으로 바뀐 이후
은메달의 영광
서울대 졸업식에 가장 열심히 참석한 대통령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직접 ‘대통령상’을 제정해 성적이 가장 우수한 졸업생에게 수상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때 대통령상의 부상으로 나온 것이 금도금한 은메달이었다. 지금도 서울대는 각 대학(원) 수석 졸업자들 모두에게 시가 13만원 상당의 은메달을 부상으로 수여하고 있다.
(왼쪽부터) 수석 졸업생들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박정희(1968년), 김종필(1975년), 최규하(1979년)
2011년 개정된 총장상 메달 규정과 실제로 수여되는 메달
서울대 수석졸업 기네스
여학생으로서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은 수석 졸업자는 1959년 학위를 받은 사범대학 영문과 박희진 학생이었다. 최초의 여학생 수석졸업자였던 그녀는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후 모교 영어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2002년 정년 교수 퇴임식에 참석한 유일한 여교수로 퇴직하였다.
미술대학 동양화과 고운산 학생은 장애인으로서 최초로 전체 수석을 차지한 학생이다. 그는 1급 지체장애인이면서도 관악산을 앉은 채로 올라가 야외 스케치 수업에 참여할 정도로 열정가이자 낙천적인 예술가였다고 전한다. 그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학생 대표 답사를 읽는 모습은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1997.2.26.
최초로 1급 장애인으로서 수석 졸업한 고운산씨가 학위수여식장에서 학생대표 답사를 읽고 있다.
형식적인 행사에서 ‘감동의 졸업식’으로
장안의 온갖 잡상인들은 졸업식 날의 대학 캠퍼스로 몰려든다… 졸업식장에 들어가지 않고 사각모를 쓴 채 핫도그를 입에 물고 돌아다니는 아들을 야단치지 않는다. 오직 기특하고 대견해서 서로 부둥켜 안고 사진을 찍을 뿐이다... 대학 졸업식은 다만 사진 찍기와 무허가 식품과 핸드폰의 축제일 뿐이다. 그 축제의 모습은 피난민 캠프의 축제와도 같았다.
-‘대학졸업식 풍경’ 김훈, 한겨레신문 1999.3.2.
20세기 서울대 마지막 학위수여식을 취재했던 소설가 김훈은 현장을 ‘심한 난장판’이라고 묘사했다. 상인들의 이권투쟁과 졸업생들의 불출석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던 과거의 학위수여식은 실제로 ‘난장판’인 면이 없지 않았다.
서울대가 그 판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2011년이었다. 서울대의 위상에 맞는 컨텐츠를 갖춘 ‘감동의 학위수여식’을 기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부터 변화를 주었다. 졸업생 가족을 포함하면 5천 명 이상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를 열 수 있는 곳이 스포츠 전용 공간인 체육관 밖에 없는 현실은 바꿀 수 없었지만, ‘천박하게 화려하다’는 평을 받던 내부 인테리어는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김수정 교수가 나서 서울대 상징색을 사용해 단순하고 미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2011.2.25.
확 바뀐 제65회 학위수여식. 공간 디자인은 깔끔해 지고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겻들였다.
60여년을 동일하게 사용하던 ‘메이커’ 없는 학위복을 새롭게 디자인 한 것도 2011년이다. 한복 디자이너인 생활과학대학 의류학과 김민자 교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상이었던 학창의를 본 뜬 디자인에 서울대 상징색을 더해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유한 학위복을 만들어 내었다.
2011년 2월까지 사용한 학위복(왼쪽)과 2012년부터 사용한 새 학위복(오른쪽)
겉모습뿐 아니라 행사의 내용에서도 의미를 더해갔다. 전통적으로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 학생대표 연사를 맡았던 전통을 깨트리고 성적과 상관 없이 타의 귀감이 될만한 대학생활을 마친 학생을 추천 받아 졸업생을 대표하게 하였다.
2015.8.28.
제69회 후기 학위수여식. 뇌성마비 장애를 딛고 누구보다 풍부한 대학생활을 살아낸 정원희 학생의 연설은 두고 두고 감동으로 남았다.
외국 유명 대학 학위수여식에서 유명 인사의 졸업 식사가 행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데 착안하여 이 때부터 학내외 유명인사의 축사 순서를 만들었다. 이후 성공적인 삶으로 존경받는 많은 학내외 인사들이 졸업 축사가 되어 ‘감동’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수들 중에는 장애를 딛고 강단에 선 이상묵 교수(자연과학대학), 국내 학위만으로도 세계적인 과학자로 성장한 백성희 교수, 여성 과학자의 전설 김빛내리 교수,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청년들의 멘토로 자리잡은 김난도 교수 등이 학위수여식과 입학식 연사로 등단했다.
외부 유명인사로는 남다른 도전과 성취, 헌신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김종훈 벨 연구소 소장,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 하형록 팀하스 회장, 김인권 애양병원 원장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2011.2.25.
김난도 교수가 “너의 계절을 준비하라”는 주제로 졸업생들에게 축사를 전했고 (왼쪽), 벨 연구소 김종훈 소장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행복추구’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이 고민 끝에 전하는 감동의 메시지들은 학교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70회 후기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너무 좋은 직장을 선택하지 말라”고 조언한 김인권 애양병원 원장의 메시지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울렸다.
오는 71회 학위수여식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로봇 공학에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끝내 세계 최고 수준의 로봇 과학자 반열에 오른 조규진 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서울대 학위수여식 축사의 전설을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