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행복연구센터 <한국 사회와 울분> 조사 발표:
19개 측정 문항 응답 결과, ‘임상적 유의한 울분 상태’도 39.9%나 돼
한국 성인 남녀 2천2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무려 14.7%가 중증도 이상의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느끼며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3년 전 조사 때보다 1.4%p 늘어난 것이고 이 울분 측정 도구가 개발된 독일에서 조사대상자의 2.5%만 중증 울분 그룹으로 분류된 것에 비해 12.2%p나 많은 것이다. 독일인 100명중 2.5명이 일상생활에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중증의 울분 속에 살고 있다면 한국인은 100명중 15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고울분군에 속한다는 말이다.
18일 오후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연구 책임자 유명순(보건대학원) 교수가 발표한 ‘한국 사회와 울분’ 조사 내용에 따르면 린덴 등 정신의학자들이 개발한 울분 지수 도구는 ‘생각할 때마다 아주 화가 많이 나게 하는 일’,‘내가 보기에 정의에 어긋나고 아주 불공정한 일’,‘상대방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일’,‘나를 친구관계나 사회활동에서 더욱 위축되게 하는 일’ 등 19가지 항목에 대해 ‘전혀 없었다’(=0점)부터 ‘아주 많이 있었다’(=4점)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울분 장애(embitterment disorder)를 측정하는 것이다.
도구를 개발한 독일 등 유럽 정신의학자들이 자가 측정 도구와 응답자의 실제 정신장애를 비교하여 제시한 절단값(cut off) 기준에 따르면, 19개 설문 응답 평균 점수가 ‘약간 있었다’(=2)와 ‘많이 있었다’(=3)의 중간 수준인 2.5점이 넘어갈 경우, 중증도 이상의 울분 상태로, 일상의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6에서 2.5점 사이 응답자들도 장기간의 울분으로 고통받으며 임상적으로 유의한 울분 상태에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이날 조사 결과 발표에 나선 유교수에 따르면 울분 점수가 1.6-2.5 사이에 있는 응답자들도 39.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1>.
<그림1. 19개 울분척도 조사를 통해본 한국인의 울분 현황>
문항별로는, ‘내 감정에 상처를 주고 상당한 정도의 울분을 느끼게 하는 일’이 28.1%의 응답자가 ‘많이 있었다’(=3점), 혹은 ‘아주 많이 있었다’(=4점)고 응답했다. ‘자꾸 반복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일’(25.5%), ‘내가 보기에 아주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일’(25.1%)도 응답자들이 자주 경험하는 일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응답자들은 “때때로 ‘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지만 한번의 실수는 즉각 비판받는다”는 항목에는 각각 66.7%, 64.1%가 동의 의사를 표시해, 자신의 노력이 세상에서 무효화(invalidation)되는 데 따른 울분도 상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응답자들의 어떤 속성이 높은 울분지수와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유교수에 따르면, 울분지수와 가장 큰 연관성을 보인 것은 응답자의 계층인식이었고, 고용상태, 가구소득도 울분 점수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자신이 중산층, 하위층에 속한다는 사람일수록 울분 평균점수는 높아졌고 일을 못하고 있거나, 가구 소득이 낮을수록 울분 정도가 심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1 참조>
이런 울분은 삶의 질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주관적 삶의 질, 삶의 만족도, 주관적 건강 수준, 우울감을 16개 문항으로 측정했을 때, 울분 점수 2.5 이상의 그룹이 2.5 미만의 그룹보다 유의미하게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림2. 울분 주요 영향 요인들>
이런 연구 결과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다양한 건강 결과에 미치는 차별적인 영향을 보고한 연구들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국 사회와 울분 조사’가 특히 의미를 갖는 것은 울분이라는 정신 현상이 개념적으로 부정적 생애사건으로 인해 초래된다는 가정 하에 이 부정적 생애 사건을 양적으로 측정하고, 이 수량화된 부정적 경험들이 어떻게 사람의 기본 신념인 공정 세계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고 이것이 다시 울분의 상승으로 이어지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점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증도 이상의 울분 집단의 경우, ‘심각한 질병, 상해, 폭력’을 겪거나 ‘실직, 폐업, 취업에 실패’하거나, ‘학교, 직장, 모임에서 모욕이나 부당한 취급’을 당하는 등 16가지 유형의 부정적 생애사건의 경험이 울분 점수 2.5 미만의 그룹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처럼 부정적 생애사건 경험이 많은 고울분 집단은 ‘세상은 공정하게 돌아간다’, ‘세상은 나에게 공정하다’는 믿음 또한 현격히 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부정적 생애사건의 경험들이 공정세계에 대한 신념을 약화시키고 이는 다시 울분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의 부정적 생애 사건 경험 뿐 아니라 ‘기업의 부도덕과 부패’,‘정치 정당의 부도덕과 부패’, ‘언론의 침묵과 왜곡, 편파보도’, ‘공권력 남용’, ‘입학 고용 관련 특혜’ 등 16가지 사회적 울분 유발 요인에 대한 조사도 진행됐다. 이 다양한 사회적 울분 유발 요인들에 대한 응답을 요인분석이라는 통계기법을 활용해 분석한 결과, 크게 ‘사회적 약속 및 규칙의 위반’과 ‘권력의 남용’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추출된 것이다. 게다가 이 두 가지 울분 유발 요인들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 결과, 나이가 많을수록, 미디어 이용이 잦을수록, 정치성향이 진보적일수록, 공정세계에 대한 신념이 낮을수록 이 사회적 울분요소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권력의 남용에 대한 울분 인식이 더욱 강한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유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울분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고 사회적으로 관리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관리 방식에 대한 해법으로 ‘희망 5각형(Hope Pentagon)’이 제시됐다. 희망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개인의 전반적인 능력을 향상시켜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것으로 울분 극복 대안으로 제시되는데 이 희망은 자아 강건성(ego strength), 인간적지지(human family support), 교육, 종교, 경제적 자산이 그것이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울분 집단의 경우, 학력 수준은 비울분집단과 유사하지만 자아강건성을 나타내는 회복탄력성이나 사회적 지지에서 특히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교수는 이에 대해 “일상이 가하는 상처들로 마모되지 않도록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강화하고,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교육, 복지, 문화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림3. 울분 극복을 위한 ‘희망5각형’ 자산 현황>
한편, 이번 연구는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최인철 심리학과 교수)의 2018년 기획 연구시리즈의 일환으로 지난달에는 이번 설문조사와 달리, 언론에 나타난 울분을 내용분석한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한림대 미디어스쿨 주영기 교수가 발표한 내용분석 결과에 따르면 정부조직/관료가 울분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신문 기사에 가장 자주 등장했고, 정치인, 기업이 그 뒤를 이은 것으로 조사됐다.
자료제공 : 보건대학원(08-880-2767)